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지휘 체계 분리 === 일본의 육해군은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즉, '''별개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는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정상적인 국가의 군대는 '총사령부'나 '참모본부' 같은 통합 지휘 체계의 수장이 각 군의 군령권을 모두 지닌 채 지휘하지만, 이 당시엔 [[미국]]도 전쟁부(육군)와 해군부가 따로 존재했다. 이 둘이 국방부로 통합된 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8년으로, 이 때부터 통합적인 지휘 체계의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그래도 이 당시 미국은 완벽한 [[문민통제]]를 위해 대통령과 전쟁부 장관, 해군부 장관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이들은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지휘했다. 거기다 의회에서 예산 심의권을 장악하고 장성급 이상과 관련되는 일은 철저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에 군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 따위는 절대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당시 일본도 천황이라는 최고지휘관이 존재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도 내각과 내각총리대신이 존재하고,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내각의 일원이었지만, 총리와 내각은 군을 통제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은 현역 무관[* 군부 대신(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을 통틀어 이르던 말.) 현역 무관제는 해군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제1차 내각 때 폐지하고 군인 물 빠진 예비역도 임명될 수 있도록 했으나, 당연히 육군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전시에 [[히로타 고키]](이 사람은 문민이었다.) 총리가 군부에 휘둘려 울며 겨자먹기로 부활시켰다.]이어야 해서 민간인이 군을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되려 육군이나 해군이 내각 참여를 거부하면 문민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민 총리가 맡은 내각이 군을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내각참여를 거부해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 이는 [[의원내각제]]를 체택한 국가에서 정당이 많을 경우에 나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툭하면 국무대신이 바뀌는 현재의 [[일본]]만 봐도 바로 알 수가 있다.] 나중에는 아예 총리를 암살하고 직접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를 문제삼고 내각에 의한 군 통제를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다. 예로 [[삼국 동맹 조약]]을 반대하고 [[태평양 전쟁]]을 막으려고 한 예비역 해군대장 [[요나이 미쓰마사]]가 총리가 되자 육군 측이 보이콧해서 내각이 6개월도 못 갔다. 이후 해군 측에서도 강경파가 등장하면서 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각의 부서로서 육군성과 해군성은 군정권은 있었지만 군령권은 별개로 이에 따른 문제가 심각했다. 본래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모두 참모본부(參謀本部)에서 군령을 담당했으나, 1888년 해군참모본부가 분리되고 1893년 해군참모본부가 해군군령부(軍令部)가 되면서 해군에 한정하여 평시 군령권을 가지게 된다. 1903년부터는 전시 군령권도 독립적으로 가지게 된다. 군령부는 참모본부와 마찬가지로 천황 직속이었고, 작전 계획을 보고한 다음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즉, 천황에게만 보고하고 승인만 받으면 육군, 해군 모두 대본영과 상대의 승인이나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우리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천황을 위하는 황군이다.'라는 [[프로파간다]]를 써먹을 수 있게 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군부독재 시절의 우리나라처럼 [[군대]]는 있되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고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합참]]이고 없이 걍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신정권 때 [[차지철]]이 이런 짓거리를 했다. 경호실이 모든 부서의 상위에 있도록 만들고, 수경사 부대는 [[경호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의 동의도 없이 맘껏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일본군의 경우는 좀 다른 게 국방부도 합참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육군과 해군이 이들 휘하가 아닌 이들과 맞먹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에는 군의 구성 자체는 멀쩡하지만(즉, 국방부 휘하에 합참이 있고 다시 그 휘하에 육해공군이 있는) 그 위에 옥상옥인 경호부가 있는 것이므로 차이가 있다.] 일단 최고사령관 겸 대원수인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천황 휘하의 어전 회의인 '[[대본영]]'에서 육해군의 작전을 총괄한다는 개념은 있었지만, 사실상 육해군 각각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는 후술할 천황의 실권문제와도 연관이 크다. 일본 역사에서 [[후지와라]]의 섭관정치로 유명한 [[헤이안 시대]] 이후 [[헤이케모노가타리]], [[가마쿠라 막부]],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 특히 이 남북조시대는 일본인들이 만세일계라고 자랑하던 [[천황]]이 둘이던 시대다. 그리고 현재 일본 역사학계가 두 천황을 다 인정하기 때문에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 왜 두 천황을 다 인정하느냐면 힘은 북조가 더 강했지만, 천황으로서의 정통성은 남조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북조만 인정해서는 천황가의 정통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즉위 절차를 거친 데다 천황으로서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미쿠사노카무다카라|3종신기]]를 가지고 요시노로 망명한 [[고다이고 덴노]]의 남조 쪽이 정통성에서는 더 위였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막부]], [[센고쿠 시대]],[* 이 [[센고쿠 시대]] 마지막을 분리해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도 막부]]라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천황은 사실상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크게 변함이 없었다.[* [[메이지 덴노]]와 [[쇼와 덴노]] 정도가 제법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이쇼 덴노]]는 제대로 정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서 치세의 대부분을 아들 [[히로히토]]에게 섭정으로 넘겨서 실질적으로 히로히토의 치세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천황은 그저 권위만 높았을 뿐 [[허수아비(동음이의어)#s-2.1|실권은 별로 크진 않았는데]], 이는 천황의 권위가 존왕양이 합리화 및 토막파의 집권을 목적으로 타의적으로 강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황에게 실권을 줘버리면 자신들의 목줄을 움켜쥐기 때문에 실질적 힘을 가진 세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정을 해 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 분화되고, 그에 따라 각 군이 자신들의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과 함께 정치권과 연결되는 지연과의 맥이 아예 끊기면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수상은 도저히 터치할 수 없는 대본영이 육군과 해군의 각축장이 된 것은 당연했다. 물론 이 당시 [[일본인]]들도 생각이 아예 없진 않은지라 통합 지휘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는 하였지만 통합적 지휘 및 조율을 하려하니 위에서 설명한 대로 '''육군과 해군이 서로 싸워대고, 각 군 안에서도 서로 싸워대고,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서로 싸워대서''' 말을 도통 듣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